사람들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고 싶어 한다. 지금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벗어나게 해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깨달음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과연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깨달음이란 지금 ‘나’라고 여기는 이 몸과 마음이 진짜 ‘나’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 육체는 마음이 없으면 나무토막과 같다. 마음이 없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손끝으로 만져도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육체는 마음과 같이 접목되었을 때 좋다, 나쁘다, 밉다, 싫다 하는 온갖 생각이 든다. 육체는 마음 없이는 안된다. 수시로 변하는 이 마음을 에고라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은 본성이 없으면 작동을 하지 못한다. 마음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원, 본성이 없으면, 우리는 꿈을 꿀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고 이 현상계에 살아갈 수가 없다. 따라서 본성이 나의 본래면목이다. 마음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본성은 영원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말한다. 내 본래 모습이 본성인 줄 모르고 지금의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하면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한다.
우리는 본성을 알고는 있지만 볼 수 없다. 모든 현상계는 본성의 나타남이다. 안경집, 칠판, 자동차, 나무 모두가 본성의 나타남이다. 본성 아닌 것이 없다. 지금 내가 나타나는 것도, 존재하는 것도 본성의 나타남이지만 지금은 중간에 에고라는 것이 나타나서 ‘나 잘났다.’ 하고 떠드는 것이다. 사실 에고는 본성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깨닫고 나면 본성이다.
본성은 이 전체에 침묵으로 가만히 있다. 본성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꿈도 없는 잠에 들면 나는 세상을 볼 수 없다. 나라는 마음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죽지 않고 존재한다. 그 자리가 본성이다. 걱정, 근심 없는 아주 평화로움만 남은 상태이다.
이 본성은 우주가 나타나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통째로 사라진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본성이 진짜 나임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는 깨달음이 엄청난 수행을 하거나 마음을 비워야 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옛 선사들은 깨닫는 것이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했다. 이미 다 깨달아 있다. 누구도 깨달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깨닫고 보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 고통, 질투 등도 모두 깨달음이다. 쩨쩨하고 신경질적이고 미워하는 것 모두가 깨달은 상태의 모습이다. 지금 이대로가 바로 깨달음이다.
우리는 내 마음이 머리나 가슴, 또는 내 안의 다른 곳에 있는 줄 알지만 아니다. 마음은 안과 밖의 구분도 없는 이 전체이다. 이 전체가 다 내 마음이다. 내가 바로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