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쓴다. 눈앞에 있는 사과도 존재하고, 책도 존재하고, 꽃도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이것만이 존재이다. 사과도, 책도, 꽃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차이점이 진실로 깨달음에 직통으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구나.’ 하는 느낌, 오직 이것만이 존재이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만이 유일한 존재이다. 오직 나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그것에서 파생된 것일 뿐이다. “저 사람도 존재감을 느끼잖아.” 이 말은 이미 중심에서 가지를 뻗은 것이다. 진리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저 사람은 존재감 있는 나 때문에 있는 것이다.
이 존재감을 찾으려고 우리는 부처가 어떻고, 장자가 어떻고, 노자가 어떻고, 육조 혜능이 어떻고 하지만 그런 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다. 또 어떤 사람은 삼천 배에 의미를 두어서 이것만 하면 깨닫는 줄 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행위를 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공부를 하려고 출발한 자, 바로 나를 찾아야 한다.
지금 살아 있는 내 존재가 무엇일까? 진정 이것이 핵심이다. 언제나 내가 존재할 때 집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자식도 있고, 남편도 있고, 하늘도 있고, 구름도 있다. 오직 내 존재에서 퍼져 나가기 때문에 나만이 오직 존재이다. 이 존재가 다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나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 세상을 본 적이 있을까? 없다. 언제나 눈을 떠서 내가 존재할 때 이 세상이 펼쳐진다. 이 세상이 모두 나의 존재이다. 그러면 근원적으로 “저 모든 것이 나네.” 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물론 이것이 단번에 되긴 어렵다. 그러나 자꾸 듣다 보면 어느새 “그래, 그냥 다 나네.”라고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사고나 습성 때문에 이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저 할머니가 나라고? 저 강아지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저 똥이 같은 본성에서 나왔다고? 나는 저들이 밉고, 무섭고, 더러워.” 이렇게 우리는 세상과 분리된 개체로서 반응하니까 깨달음과 멀어진다.
이제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가치나 개념을 단호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